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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1.17 [세첸] 일부러 이러는거야 5

 

 

 

첸총 21, 일부러 그러는 거야.

  w.판더비

 

 

 

 

 

 

 김종대는 희망과 설렘에 찬 복학생이었다.

 

 

 복학 신청 버튼을 누를 때만 해도 종대는 자신 있었다. 남들은 지옥과 같았다던 군대도 특유의 명량함으로 잘 견뎌냈던 그다. 복학이 뭐가 두렵겠는가. 나는 이제 육군 예비역인데! 어리고 앳됨을 벗고 남자 냄새를 풍기는 것 같아 거울을 볼 때 마다 뿌듯했다. 말년 때부터 눈치 봐가며 조금씩 길러왔던 머리는 제대 후 패스트 샴푸를 열심히 쓴 덕분인지 군인 티 안 날 정도까지 왔다. 걱정 없었다. 인기 교양 찍기에 실패하고 인원 널널한 과목을 시간표에 넣었어도, 그 과목에 조별과제가 있었어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난 짱 멋진 예비역 복학생 오빠니까!

 

 

 

 

어때요 형? 눈에 더 잘 들어오지 않아요?”

 

 

 종대는 지금 그랬던 과거 저를 찾아가 멱살을 짤짤 흔들고 싶었다. 무슨 패기로 조별과제인 걸 알고도 수강 철회를 안 했어? 나 왜 그랬어어어??

 

 

 

이상해요?”

아니, 아니 이상하지 않아! 하지만 교수님 연세가 있으셔서 눈이 침침하실 테니깐 글씨는 그지같, 아니 노란색 말고 다른 색은 어떨까 세훈아?!”

 

 

 종대는 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세훈의 손에서 마우스를 빼왔다. 노트북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니 이제 너무 익숙해진 비숑 프리제 근접샷이 PPT 배경으로 박혀있는 게 보인다. 이 족같은 오세훈네 개새끼.

 

 

 

 

 

 

 

 딱 하나 담기에 실패한 과목은 종대가 1학년 때부터 차일피일 미뤄왔던 필수교양이었다. 강의명만 봐도 잠이 쏟아진다면서 대책 없이 빼놨던 바로 그 과목, <동서양 문화역사의 이해>. 점수 잘 준다고 소문난 교수님 것 대신 조별과제가 있는 걸 신청하게 됐지만 철회할 맘은 없었다. 여태까지 미룬 거, 더 미룰 수 없다는 복학생의 다짐이었다. 그래서 교수님이 3인씩 임의로 배정한 저희 조에 중국인이 있었어도 머리만 긁적이고 말았다. 다른 한 명이랑 더 열심히 하면 되겠지 뭐.

 

 

 문제는 그 다른 한 명에게 있었다.

 

 

 

 

경영학과라며. 걔들은 조별 수업 많이 하지 않냐? 근데 자료조사를 이따위로 해온다고?”

. 존나 믿기지가 않지? 나도 그래.”

나 신입생 때 처음 조별과제 할 때도 블로그 주소 링크는 안 보냈다. 김종대 불쌍해서 어떡함. 야 도경수! 이 것 좀 봐봐, 진짜 웃겨.”

뭔데.”

 

 

 찬열이 큰 소리로 부른 덕분에 막 들어온 경수를 비롯해 과방의 아는 사람들이 죄다 종대의 노트북에 몰려들었다. 김종대 교양 수강신청 망하더니 조원도 완전 망했어. 자료조사 해오랬더니 블로그 주소 올려놨대. 찬열이 낄낄 웃자 종대가 우울하게 덧붙였다.

 

 

피피티 보이냐. 배경이 지네 집 강아지야. 멍멍.”

와 대박. 진짜 골 때린다.”

이거 솔직히 엿 먹으라고 하는 거 아니냐? 피피티 배경에 개새끼 얼굴이 웬 말. 김종대 복학 후 당찬 과탑의 꿈, 교양 조별과제에 발목 잡히나요~”

 

 

 죽는다 변백혀언! 내 노트북 내놔! 위로는 못할망정 놀리는 동기들에 짜증이 난 종대가 노트북을 뺏어 가방에 쑥 집어넣었다. 너무 속상했다. 복학하자마자 이런 조원을 만나서 동기들한테 놀림이나 받고! 내가 상상한 복학 라이프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 수업의 종대네 조원은 모두 남자였다. 같은 학번의 중국인 유학생, 두 학번 아래의 키가 커다란 경영학도. 여자애가 없어 자신의 오빠미를 보여줄 수 없는 것도 아쉬웠고 중국 학생이 껴있어서 걱정도 들었다. 그렇지만 한 놈이 경영학도라니 어떻게든 둘이 커버할 수 있을 거라 낙천적이라 생각했었다. 걔들은 발표 수업이 많으니까 잘할 거야! 헌데 이게 웬걸.

 

 

 

씽이 형 이 자료 어디서 구하셨어요? 중세 중국 문학은 여기서 다 찾아 쓰면 되겠는데요?”

허헛. 우리 교수놈 방에 있눈 책들 쌔벼와쏘. 종따가 조아하니까 조흔거지?”

문학 파트는 여기서 찾으면서, 없는 것만 추가하면 될 것 같고예술품 쪽은

 

 

 의미 없이 몇 번 마우스를 클릭하던 종대가 오른쪽에 앉은 사람 얼굴을 흘끗 살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작다고 느꼈던 입술이 꾹 다물려 있었다. 하하. 억지로 웃은 종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지금 니가 추린 인터넷 주소 중 하나 클릭했다가 연예인 패션 기사를 봤는데도 할 말이 없는 거니?

 

 

 배경 지식이 전무한 셋이서 중세 중국의 문화예술을 주제로 삼은 게 잘못이었을까 싶다가도, 자신과 이씽이 조사한 걸 보면 또 괜찮았다. 문제는 다 저 놈이었다. 서늘한 눈으로 쳐다보며 자료가 이게 다에요? 더 똑바로 못해오세요? 하고 비아냥거리면 모를까, 이렇게 못하리라곤 생각도 못한 저 놈, 오세훈 때문에.

 

 

 뭐 커다란 걸 바란 것도 아니었다. “남자 셋뿐이지만, 그래도 다 같이 노력해서 좋은 점수 받아요!”란 종대의 말에 이씽과 세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공평하게 자료조사 단계부터 삼분의 일로 나눴다. 조사 범위만 다를 뿐 하는 일은 다 똑같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유독 세훈의 결과가 달랐다.

 

 

, 세훈이 너는 이게끝이야?”

 

 

 내가 너한테 도자기 좀 알아보라고 한 게 그렇게 잘못이니? 중국이 주제인데 고려청자가 왜 있어? 그때까진 그저 모두 다 해왔다는 것만 좋아하던 장이씽 학우를 두고, 종대 혼자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 뒤 조별모임은 당연하게도 악몽의 연속이었다. 2주 동안 김종대를 경악시킨 오세훈의 패턴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김종대가 자료 조사를 시킨다. 오세훈은 아무 쓸모없는 블로그 주소를 긁어 온다.

 김종대가 웃는 얼굴로 재조사를 시킨다. 오세훈의 아무 쓸모없는 블로그 주소 목록에 ‘[단독] 탑스타 A, B작가 드라마 출연 확정라는 제목의 인터넷 기사가 추가된다.

 오세훈에게 자료받기를 포기한 김종대가 피피티 초안을 나눠 만들도록 시킨다. 오세훈의 아무 쓸모없는 블로그 주소와 연예인 인터넷 기사의 배경으로 하얀 개새끼가 있다. 뭐냐 물으니 지네 집 강아지 비비란다.

 

 종대는 군대에서도 피지 않았던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

 

 

 

 

 

 

김종대.”

 

 경수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씩씩대고 있는 종대 옆에 와 앉았다. 이제 백현은 거위의 꿈 노래를 과탑의 꿈으로 개사해 불러대고 있었다. “~~~ ~ 난 과탑꿈이 있었죠~” 과방이 노래 소리 반, 웃음소리 반으로 시끄러워진다. 아 진짜 짜증나! 그만 하라고오! 억울해서 발만 동동 구르자 경수가 어깨를 잡아 저를 보게 한다. 다들 웃고 있는데 경수 혼자 진지했다.

 

 

걔 그거, 조별과제 하기 싫으니까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야? 이렇게 하면 너가 단념하고 자기한테 안 시키겠구나,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냐고. 절대 안 봐준다고 똑 부러지게 말해. 교수님한테 말해서 이름 빼버리던가.”

으응, 알았어.”

너 혼자 조별과제 독박 쓰는 호구 짓 하지 말고. 알았어?”

 

 

 으으응먹혀 들어가는 대답에 경수는 영 못마땅한 얼굴이다. 단호하게 호구 짓 하지 말라는 경수 앞에서 종대는 차마, 제가 호구 짓을 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경수야 나 호구 맞아, 나 있지 실은

 

 

 

 

 

 

 

 일주일 훨씬 전, 공강 시간에 세훈이 보낸 자료에서 A군의 드라마 확정 단독 기사를 본 종대는 열 받아 당장 세훈에게 카톡을 했다. ‘지금 수업시간이야? 오늘 나 좀 봐. 과제로 할 얘기 있어.’ 지금 수업이 없으니 만날 수 있다는 답장이 왔다. 학관 카페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종대는 할 말을 정리했다. 대부분 지금 경수가 조언한 말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때려 쳐라, 교양 과제라고 무시하냐, 이름 빼겠다

 

 

, 찾으셨어요?”

어 그래 앉

 

 

 어우 너 오늘 왜 이렇게 잘생겼니? 종대는 하마터면 이 생각을 그대로 말할 뻔 했다. 비가 와 날씨가 좀 쌀쌀했는데, 세훈은 완전한 가을복장으로 하얀 목 폴라에 멋진 가죽 자켓을 입고 있었다. 나도 이런 거 샀다가 박찬열한테 수금하러 다니냔 소리 듣고 장롱에 처박아 버렸는데. 얜 왜 이렇게 멋있냐한참 그를 훑던 종대가 세훈의 의아한 형?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이럴 때가 아니야! 종대가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었다.

 

 

조별 과제 때문에 그러는데.”

왜요? 뭐가 잘 못 됐나요?”

 

 

 뭐 임마? 뭐가 잘못됐나요? 다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눈을 부라리려던 종대는 세훈의 표정을 보고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날카롭게 생겼다면 매우 그렇다 말할 수 있는 얼굴이 겁을 먹어 있었다. 종대는 마치 동전 대신 버찌씨를 내고 잘못된 게 있냐 묻는 꼬마 손님을 지켜보는 위그든 아저씨가 된 기분이었다. 세훈이 청룡영화제 대상을 수상한 경험이 없다면, 저건 정말로 지 잘못을 몰라서 겁을 먹은 얼굴이다. 종대는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러니까, 네가 보낸 자료들 말이야. 우리 주제에

……

우리 주제에는

제가 너무 못했나요? 죄송해요. 저는 열심히 하려고 한 건데

 

 

 세훈의 잘생긴 얼굴이 창피함에 발갛게 물들었다. 오물대던 작은 입술이 고개를 숙이자 사라진다. 차가운 얼굴이 저렇게 귀여워질 수 있어? 내가 여자였으면 이거 진짜 뻑 갔다. 진짜 잘생기고 귀여워. 종대는 저도 모르게 심장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세훈아!! 우리 과제 범위를 좀 바꿔 보면 어떨까 해서 말이야!!!”

 

 

 

 따박따박 쏘아붙이려고 생각했던 말들은 목구멍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 뒤로 세훈이 아무리 족같은 결과물을 가져와도 아무 소리 할 수 없게 됐다. 이게 호구 같다는 건 자신도 알아 차마 경수와 다른 동기들에게 털어 놓을 수 없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세훈이 혹시나 뭐가 잘 못 됐나, 눈을 굴리고 얼굴을 물들이는 걸 보면심장이 너무여자 여럿 고생시킬 상이야 아주.

 

 그 얼굴에 뻑가서 자기가 고생하는 건 생각도 못한 종대다.

 

 

 

 

 

 

 이런 종대의 조별과제 호구 짓 때문에 가장 먼저 타격받은 것은 학점도 아니요, 수면 부족도 아닌 연애 사업이었다. 귀여운 여자후배들의 지갑을 자처하며 좋은 선배, 멋진 종대오빠 이미지를 쌓고 거기서 썸 좀 타다가 잘 되는 게 당찬 목표였는데, 그걸 세훈이 다 망쳤다. 어쩜 그렇게 타이밍도 잘 맞추는지 후배들에게 밥을 사주기 위해 우르르 끌고 나갈 때마다 세훈에게 카톡이 오는 것이다.

 

 

'종대 형 저 이거 추가해도 될까요?'

'근데 여기에 삽입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저 여기 학교 앞 스타벅슨데 좀 도와주시면 형 공강이시면 도와주실 수 있어요?'

 

 

 종대는 당연히 그 카톡을 씹으려 했다. 어차피 내가 다 하게 될 피피티! 내가 왜 굳이 지금 널 보러 가냐? 내 이미지 구축과 연애 밑밥이 더 중요하거든?

 

 

선배님 카톡 계속 오시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아하하, 괜찮아. 그리고 선배님이 뭐야아, 딱딱하게. 종대오빠라고 불러.”

 

 

 수줍어하는 후배들에게 눈웃음을 쳐준 종대는 알람을 꺼버리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켰다. 미리보기 창으로 걱정하는 세훈의 카톡이 계속 오고 있었다. 나는 네가 무슨 짓을 하던 내 후배들과 밥을 먹어야겠어. 데이터를 끄려는 순간, 미리보기로 사진이 떴다.

 

 

 

선배님 저희 비싼 거 먹

시발.”

?”

얘들아 진짜 미안한데, 오빠가 점심은 다음에 사줄게. 급한 일이 있어서. 진짜 미안해.”

 

 

 후배들의 표정이 썩어가는 게 보였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1순위였던 게 더 이상 1순위가 아니게 됐다. 제가 깔끔한 스타일로 만들어 놓은 피피티 배경에 또 다시 오세훈의 비숑 프리제 비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야 이 미친, 내가 배경 바꾸지 말자고 너랑 도장 복사도 찍었는데 오세훈!!! 이쁜 후배들을 뒤로 하고 종대는 눈썹 휘날리며 스타벅스로 내달렸다. 죽일 거야!! 이번엔 진짜로 죽일 거야!!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 복장 터트리려고!!!

 

 

 

, .”

허억, 세훈

형 뛰어오셨어요? 천천히 오셨어도, 혹시 제가 카톡 많이 보내서?”

 

 

 죄송해요. 죄송해요 형.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라, 좀 더 잘 하고 싶어서 보낸 건데. 이렇게 뛰어오실 줄은 모르고차갑기만 한 얼굴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광대부터 귓불, 목 뒤까지 발갛게 물드는 것을 헉헉대며 지켜보았다. 죄송해요 형. 유독 작은 입술이 누가 들으면 아직 변성기인가 생각할 정도로 앳된 목소리를 내뱉는다. 짹짹대는 것 같다. 긴 심호흡 끝에 종대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야 세훈아, 형이, 목이 말라서 뛰어온 거야

 

 

 저 잘생긴데다 귀여운 얼굴을 두고 니가 죄송함을 알긴 하냐고 물어 볼 수 없어 종대는 또다시 전의를 잃었다. 제 눈치를 열심히 보는, 분위기는 서늘하기 짝이 없으나 사람 마음 어딘가를 절절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세훈 때문에. 늑대의 탈을 쓴 병아리같다. 종대가 앞자리에 털썩 앉아 마른세수를 하자 세훈이 얼른 묻는다.

 

 

형 케이크 드실래요? 제가 살게요.”

. 잠깐 노트북 좀 줘 볼래? ……그래 세훈아. 이대로 안 보내고 같이 하자고 해서 고마워우리 어디서부터 다시 볼까?”

 

 

 내가 제멋대로인 형만 두 명이고 동생이 없어서 저런 동생다운 허술한 면모에 약한 건가봐. 좀 많이 허술한 결과물을 뜯어고치며 종대는 해탈한 심정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세훈이가 키만 컸지 어린애지, 막내 동생같지따가운 가을 볕 쏟아지는 졸린 점심, 종대의 감정 역시 참 나른했다.

 

 

 

 

 

 

 

 세훈이 꼬박꼬박 종대에게 중간 컨펌을 받아서인지 과제는 나날이 순항이었다. 적어도 피피티 배경에서 오세훈네 강아지 비비 얼굴 볼 일은 없었다는 얘기다. 비록 이제야 세훈 몫 과제의 심각성을 안 이씽이 세훙, 이렇게 고지가치 해오묜 오또케?” 하고 짜증을 내는 바람에 종대가 중간에서 중재하느라 새로운 애를 먹어야 했지만. 발표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자연히 셋이서 저녁식사도 늘었다. 저녁은 늘 돈 많으니 걱정 말라며 대륙의 부내를 풍기는 이씽이 냈는데, 세훈은 그걸 영 못마땅해 했다. 그 날도 이씽이 저녁을 샀던 날이었다. 최종 피피티를 조언 차 교수님에게 보내 놓고 맘이 가벼웠던 한 가을 날.

 

 

 

오늘도 씽이 형이 저한테 뭐라 했어요.”

 

 

 뾰로통한 세훈의 목소리에 종대는 그냥 웃었다. 저녁에 곱창을 먹다가 술이 들어간 이씽이 이제 알리바바인쥐 알리비비인쥐 하눈 개눔색기 묜상 안 봐소 돠행이야!”라고 직구를 날렸던 것이다. 세훈은 속상해 보였지만 종대는 하마터면 기립박수를 칠 뻔 했다. 어찌나 시원했는지 2차로 치킨을 쏘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이씽은 기숙사 점호 때문에 안 된다며 들어가고, 자리가 어딜 가나 만석이라 세훈의 자취방에 가는 길이었다. 종대가 웃기만 하고 말이 없자 세훈이 입술을 꾹꾹 물더니 다시 투덜대기 시작했다.

 

 

 

맨날 나만 뭐라 하구그 형 사실 한국말 잘하는 거 아닐까요? 가끔 중국어로 뭐라 하는 거 제 욕일 것 같아요. 그리고 그 형은 왜 은근슬쩍 형한테 터치해요? 막 손놀림이 이상해요. 엉덩이 만지구 막. 나도 그러고 싶어요.”

 

맨날 뭐라 하는 이유를 너만 모르니? 응 그거 욕 맞을 거야. 그 타이밍에 나도 속으로 너 욕했거든난 남잔데 엉덩이 좀 토닥인 게 무슨 죄니그래 그럼 너도 만지,

 

 

 

 꼬박꼬박 속으로 대꾸를 하던 종대가 세훈의 마지막말에 걸음을 멈췄다. 발자국 소리가 멎자 뒤를 돌았던 세훈이 곧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술에 취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몰랐나보다. 완연한 가을이라고 세훈은 비니를 쓰고 남방을 걸쳤는데, 가로등 아래 그게 참 멋있어서 종대는 방금 의문을 품었던 세훈의 말을 (언제나 그렇듯) 까먹어 버리고 사르르 웃었다. 뉘 집 자식인지 참 잘생겼네. 종대의 웃음을 본 세훈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그리고 입을 또 꾹꾹 누르더니, 세 걸음 뒤의 종대에게 휘적휘적 다가와서.

 

 쪼옥.

 

 

 

. , .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나는, 아니, 하고 싶었던 건 맞는데, 아니! 그니까 충동적으로

 

 

 세훈이 쩔쩔매는 동안 종대는 여전히 상황파악이 덜 됐다. 곱창을 너무 많이 먹었나. 지금 내 입술에 닿은 게 뭐지? 아직 멍한 종대를 보고 세훈의 날카로운 눈에 눈물이 고인다. 헐 얘 우는 거야? 당황한 종대가 일단 세훈을 달랬다. , , 괜찮아 세훈아. 왜 울고 그래.

 

 

괜찮아요? 괜찮은 거에요?”

음 아마도

그럼, 그러면

 

 

 흐읍. 세훈이 숨을 들이키자 눈에 아슬아슬 고여 있던 눈물이 뚝 떨어졌다. 무슨 보석이 떨어지는 것 같네.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방울 흘려놓고도 세훈의 눈은 젖어 있었다. 어안이 벙벙한 종대에게로, “그러면 한번만 더요.”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따듯한 무언가가 다시 찾아 왔다.

 

 

 

 이번엔 확실하게 알았다. 인적 없는 자취방 골목 길 가로등 밑에서, 능력 없는 조원인 세훈과 입술을 맞대고 있다. 몸이 굳은 종대가 눈알만 데구르르 굴렸다. 내가 지금 남자애랑 뭐하는 거지? 가랑이를 까버리고 화를 내야 하는 건가? 모든 게 의문인데 가만히 받아주고 있는 자기가 제일 의문이다. 코앞에 세훈의 얼굴이 있다. 갈매기 모양의 눈썹과, 꾹 감고 있는 눈과, 살짝 찡그려진 미간. 교양 같이 듣는 남자애와 키스도 아닌 것을 하고 있다니. 근데 언제나 세훈의 얼굴을 보면 그랬던 것처럼 모든 생각들이 사르르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가슴께가 간질간질 한 것 같기도

 

 

 종대의 발끝이 저릿해질 때 쯤 세훈이 마주대고 있던 입술을 뗐다. 종대나 이씽이 눈치를 줄 때처럼 볼이 분홍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종대는 아무 말도 못하고 굳은 얼굴로 세훈을 보았다. 가슴이 쿵, 쿵 빠르게 뛰고 뱃속이 간지러웠다. 이 기분을 뭐라 해야 하지? 종대가 말이 없자 세훈의 눈이 또 글썽인다.

 

 

미안해요 형.”

 

 그러더니 저 혼자 달음박질 쳐버리는 것이다.

 

 

 

 

 

 그 뒤를 쫓아가 태평하게 치킨먹자! 할 자신이 없어서 종대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 오냐고 엄마보다 심하게 잔소리하는 민석과 준면을 제치고 방에 들어와 침대 위로 털썩 쓰러졌다. 자기도 모르게 입술에 손이 올라갔다. 아직도 뜨끈한 기분.

 

 

우이이이, 이게 뭐야아.”

 

  

 

 머리를 잔뜩 헤집어 놓은 종대가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했다. 세훈의 수상쩍은 행동들에 대하여. 처음 조가 짜여 지고 소개할 때 유독 작았던 목소리. 움츠러들었던 넓은 어깨. 시도 때도 없이 왔던 카톡. 만날 때마다 아낌없이 사줬던 디저트. 무엇보다 정말 과제 무임승차인가, 싶었던 과제들. 아까 전의 키스. 깨달음과 동시에 얼굴이 빨갛게 타올랐다. 세훈이 왜 그랬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일부러 그랬구나, 나를좋아해서.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데에 거부감이 있지는 않았다. 아니, 아예 그쪽으로 관심이 없었다. 나랑은 정말 동떨어진 얘기라고 생각해서였다. 아직 여자 손 한번 제대로 못 잡아 봤는데, 남자가 날 좋아하다니. 왜 하필 남자한테 인기가!! 근데 나 기분 나쁘지는 않았어. 오히려 조금기묘한 간지러움이 아랫배서부터 올라왔다. 야동 볼 때나 느껴봤던 감각에 종대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으아아아악!! 부끄러워!! 당장 내일부터 오세훈 얼굴 어떻게 봐!!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는데!!!

 

 

 

 

 

 그러나 쓸모없는 고민이었다. 다음 날부터 세훈을 보기 힘들어졌다. 몇 분마다 하던 카톡도 뚝 끊겼고, 심지어 세훈은 조별 모임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이런 십벌내일모레이가 발표인뒈 세훙 혹시 돌아쏘??”

 

 

 커피 안의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으며 이씽이 분기탱천했다. 종대는 그 앞에 앉아 세훈이 보낸 카톡을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몸이 안 좋아서 발표 연습 못나갈 것 같아요. 발표엔 지장 주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피피티도 다 만들고 각자 발표할 발표문도 만들었기 때문에 세훈의 빠짐이 큰 문제는 아니었다. 교양 과제 치고 종대네 조가 오프라인 모임이 매우 잦은 축이었기에 한 번 빠지는 거야 이해했다. 그런 건 상관없는데. 종대는 눈썹을 뉘이며 다시 카톡을 읽었다. 왜 형이 아니고 선배님이지?

 

 

 결극 발표 전날까지 세훈은 나오지 않았다. 이씽은 현란한 욕을 선보였고 종대는 더욱 시무룩해졌다. 먹튀? 이게 바로 신종먹튀인가? 아니 혀를 넣은 것도 아니고 애들처럼 입술만 부딪혔는데 이게 무슨 낯가림? 지가 먼저 해놓고 후회를 하는 건가? 키스도 아니고 뽀뽀 좀 했다고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내 주목 좀 끌려고 조별과제도 일부러 그따위로 해놓고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게 어딨냐구!! 티비를 보다가 발을 동동 구르자 야!! 시끄러워!! 하고 민석과 준면의 고함이 날아들었다. . 다 미워! 다 싫어!

 

 

 

 

 그렇게 발표날이 왔다.

 

 

 

 종대는 다른 때보다 일찍 강의실에 와서 빔 프로젝트를 켜놓고 피피티를 바탕화면에 옮겨놓느라 바빴다. 이씽이 조금 뒤에 도착해 함께 피피티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하던 중,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세훈이었다.

 

 

저 왔어요.”

. 어어. 발표 준비 잘 했지?”

 

 

 너 이 새끼 남의 맘 싱숭생숭 하게 해놓고!! 멀쩡한 사람한테 게이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니가 잠수를 타?! 이 개새끼!!! 밤새 발표문보다 더 되새겼던 말은, 이틀 새에 수척해진 세훈의 얼굴을 보자마자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항상 분홍색이던 입술이 하얗게 질린 게 아픈 것 같았다. 종대는 순식간에 죄책감에 휩싸였다. 아픈 애를 두고 내가 무슨 저주를김종대 이 나쁜 새끼!

 

 

 

후우, 나 긴장하고 이쏘? 배 아푸네. 세훙, 종따, 짜요.”

 

 

 정말 긴장한 모양인지 이씽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종대는 여후배가 어디 찬데 앉을 때에 깔아주려고(아직 단 한 번도 쓰지 못한) 상비하던 손수건으로 이씽의 이마를 두드려주었다. 발표 순서대로 바로 옆에 앉은 세훈이 그 모습을 힐끔 보고 갈라진 입술을 감쳐물었다. . 내가 뭐 잘못했나? 전에는 세훈이 종대 눈치를 봤는데 이제 종대가 세훈 눈치를 본다. 미묘한 기류 속에 들어오신 교수님이 출석 후 종대네 조를 불렀다.

 

 

발표 먼저 듣고 갑시다. 김종대, 오세훈, 장이씽 조 맞죠? 발표하세요.”

 

 

 

 첫 파트를 맡은 종대는 여유롭게 발표를 해냈다. 중간 중간 세훈의 서늘한 눈빛에 흠칫하기도 했지만, 그게 노려보는 게 아니라 집중하는 얼굴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과제를 준비할 때 항상 저런 얼굴로 자신을 봤었다. 나한테 집중하고 있는지도 모르고종대가 자기 파트 발표를 마치자 박수갈채가 나왔다. 다음은 이씽의 차례였다.

 

 

, 조는 중궈, 중국 문학이 파트를 마툰후우

형 어디 아픈 것 같은데

 

 

 세훈의 말에 종대 역시 걱정스럽게 이씽을 쳐다보았다. 어제 마지막 모임에서 연습할 때는 저한테 발음 교정까지 받아가며 잘 했었는데, 지금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더듬고 있었다. 강의실의 분위기 역시 어수선 해졌다.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발표를 이끌어가려고 노력하던 이씽이 갑자기 강단 아래로 주저앉았다. 학생들도 놀라고 교수님도 놀라서 일어났고, 종대도 깜짝 놀라 앞으로 튀어나갔다.

 

 

, 형 괜찮아요?”

종따, 배가 아푼

 

 

 하얗게 질린 얼굴에 배를 잡고 끙끙대는 게 심상치 않았다. 다가온 교수님이 앞자리의 건장한 남자애 둘에게 학교 양호실로 데리고 가달라고 지시했다. 아픔에 눈도 못 뜨면서 부축을 받아 일어난 이씽이 종대와 세훈 쪽을 쳐다보았다.

 

 

발표부타기한다

 

 

 강의실 문이 탁 닫혔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했다. 피피티는 아직 중세 중국의 문학파트에 멈춰져 있는 채였다. 어떡해, 이걸 어떡해. 종대는 어찌 할 바 모르고 발만 굴렀다. 세훈을 도와주느라 세훈이 맡은 예술품 쪽은 어느 정도 알았는데 이씽의 발표문은 한번밖에 안 읽어봤다. 발표 어떡해!

 

 

.”

 

 

 내가 할게요. 교수님도 갑자기 일어난 일에 참 난감한 시선으로 쳐다보고만 있던 중, 세훈이 종대의 어깨를 감싸고 자리로 떠밀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진 이씽의 발표문을 주워 강단 위에 섰다. 눈에 힘을 빡 준 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너는 뭘 어쩌려고?? 나는 너가 발표하는 게 제일 걱정인데?? 눈썹이 추욱 내려간 종대를 잠시 응시한 세훈이 입을 열었다.

 

 

 

발표에 차질이 있던 점 사과드립니다. 다시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중어중문학과 장예흥 학우의 발표를 이어 받은 경영학과 오세훈입니다. 중세 중국의 음악문화 이후 설명해 드릴 것은, 당대의 상상력을 가장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문학입니다.”

 

 

 오물오물 작은 입술을 움직여 낮게 말하는 데 정말, 까리하다는 말 밖에는 표현을 못하겠다. 종대는 거의 울 것 같이 눈을 빛내며 세훈의 발표를 지켜보았다. 자기들 앞에서 발표연습을 한 적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또박또박 전달하려고 입술을 크게 크게 움직이고 두런두런 강의실 여러 곳으로 시선을 보내는 세훈을 보고 종대는 생각했다. 나 지금 쟤한테 키스하고 싶어!

 

 

 

 세훈은 자신의 발표까지 연이어 잘 마쳤다. 커리큘럼 외의 주제에서 발표하는 거였으니 교수님이 따로 지적할 부분도 없었다. 이씽에게는 우는 소리로 급성 장염때문에 응급실에 와 있다는 전화가 왔다. 교수님께 진단서를 내면 문제없을 거니 걱정 말라고, 푹 쉬라고 위로해주었다. 이제 약 3주가량 종대를 괴롭혀왔던 조별과제는 끝났다. 다만 해결해야 할 게 있다. 종대는 최대한 빠르게 강의실을 빠져나가려는 세훈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세훈아! 발표도 잘 끝났는데, 지난번에 못 먹은 치킨, 먹을래?”

 

 

 

 

 

 

 다소 이른 오후, 둘은 치킨을 사들고 세훈의 자취방에 자리를 잡았다. 자취방은 딱 세훈 하나 지낼 정도의 크기였다. 자취방 입구에서 갑자기 폭발한 병아리처럼 잠시만요!!!”하고 삐약삐약 소리를 지르고 기다리게 하더니, 앞에 서서 상상했던 것 보다 깨끗했다. 오히려 부모님과 같이 사는 제 방이 더 더러울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칠까봐 무서운지 앞 접시에 코를 박고 치킨에 열중하는 세훈을 두고, 종대는 맥주를 연거푸 들이키며 눈을 굴렸다. 누구 하나 쉽게 깨기 힘든 침묵이었다. 그렇게 사온 맥주 피처 두 통이 금방 사라졌다.

 

 

.”

 

 

 숨 막혀서 죽을 것 같을 때 쯤 세훈이 입을 열었다. 역시 답답했는지 맥주를 쭉쭉 들이킨 탓에 목덜미며 얼굴이 얼룩덜룩 발갰다. 다시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세훈의 입술을 본 종대가 긴장해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때요, 전에 치킨 먹기로 했던 밤.”

, 으응.”

그 때죄송했습니다.”

 

 

 으응? 저는 형을 좋아해요. 그동안 과제로 형 신경 쓰이게 한 것도 다 일부러 그런 거였어요. 형이 저 한 번이라도 더 봐주실까봐- 따위의 말을 짐작하고 있던 종대가 세훈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 죄송한데? 종대의 놀란 얼굴을 힐끔 쳐다본 세훈은 면목이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키스 한 거요. 형은 원하지도 않으신데, 제가 그날 술을 먹고형을 너무 좋아해서죄송합니다. 계속 숨겼어야 했는데 제가 자제를 못했어요.”

……

좋아해서 죄송해요.”

 

 

 세훈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다시 종대를 보는 눈에는 정말 미안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내가 감히 널 좋아하고, 그걸 표현해서 미안하다는 물기에 젖은 눈. 울컥한 종대가 자기 잔에 남은 맥주를 원샷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그리고 너 키스할 때만 미안해?! 너 나한테 막 수작 걸었잖아아, 그거 다 일부러 그랬잖아 너!! , 막 미용 블로그 주소 따오고, 일부러 너네 집 개새끼 사진 피티 배경으로 넣어서 나 한 번이라도 더 보게 하려고 하구, 막 별거 아닌 걸로 카톡 하고! 과제 그렇게 병신같이 해온 거 다 일부러 그런 거잖아! 그것만 그랬어? 너 내가 여자애들 데리고 밥 먹으러 갈 타이밍 보고 있다가 막 나 불러냈잖아아 나 연애도 못하게!! 막 맛있는 거 먹이고! 근데 이제 와서 키스도 아니고 뽀뽀 한 걸로 뭐어어? 죄송하다구? 이렇게 물러날 생각하지마라! 너 나 책임져! 책임지라고오오!!”

 

 

 씩씩대며 질러 놓고 보니 세훈은 완전 얼이 빠져 있었다. 아까 전 병신 같은 피피티에서 1차로 동공지진을 하고 연애도 못하게 했다는 거에서 2차 동공 지진 하더니 이제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근데 그 멍한 얼굴도 너무 멋있어서 종대는 치킨이 놓인 소반을 밀며 세훈에게로 얼굴을 들이대 계속 징징댔다. 책임져어, 니가 일부러 그래놨잖아! 나한테 너 얼굴 너 성격 먹힐 거 다 알고 있었지! 나 게이 된 거 책임지라고오. 투닥투닥 세훈의 팔뚝을 치다 번뜩 손목이 잡혔다.

 

 

 

진짜로.”

……

책임져도 돼요?”

 

 

 아까 강단 위에서 발표 할 때, 카리스마 있던 그 모습이다. 종대가 침을 꿀꺽 삼켰다. 항상 눈치만 보고 안절부절 못하던 매서운 눈이 이제야 제 모양새대로 매섭게 불타고 있었다. 같은 남자로서 그것이 뜻하는 바를 잘 아는 종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뒤에 있는 이불더미로 몸이 넘어갔다.

 

 

 

 

 

 

 

아흐윽!! 아파, 아파아.”

미안해요.”

 

 

 종대의 관자놀이에 있는 점에 여러 번 버드키스를 남긴 세훈이 미안하단 말을 하며 좀 더 깊숙이 몸을 밀어 넣었다. 아파아! 엄살이 아니고 진짜로 아파서 종대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잘게 들어오던 허릿짓이 멈췄다. 아파, 정말 아파. 종대는 좀 더 투정을 부리기 위해 눈물을 닦아내며 세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또 한 번 심장이 떨어질 뻔 했다. 세훈이 너무나 안타깝고 애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힘들게 하고 싶지 않은데, 눈물을 보고도 잘 달래줄 수 없어 어찌 할 바 모르는.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씨이이, 너 진짜 반칙이야아.”

 

 

 그 얼굴 정말 반칙이야. 내가 너 그 표정에 약한 거 알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이. 코를 먹으며 종대는 다리를 세훈의 허리에 감싸 그를 끌어 왔다. 아래가 홧홧한 게 정말 아픈데, 이 얼굴을 보면 그런 것쯤은 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해도 괜찮아요? 세훈이 귓가에 속삭이자 종대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간지러웠다.

 

 

몰라아, 모른다고. 다 니가 책임져어.”

알았어요. 알았어요.”

! 아아, , , !”

 

 

 

 세훈이 계속 종대의 몸 여기저기에 키스를 하자 몸의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아까보다 삽입이 쉬워진 것을 느낀 세훈이 종대의 허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덤벼들었다. 아앗! ! 하앙, 세후! 나아! 눈도 못 뜨고 세훈을 찾은 종대를 와락 안으며 세훈이 귓가에 다시 속삭였다. 여자친구, 만들려고 했어요? 언제 그랬, 어요. 앞으로, 그러면 혼나요. 내가 책임, 질 거니까, 이제 너 내 꺼야. 세훈의 낮은 목소리와 욕망에 찡그려진 얼굴을 보며 종대는 흥분에 달아올랐다. 이제 완전히 세훈의 페이스에 맞춰 흔들리며 속절없이 높은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너무나, 너무나 섹시했다.

 

 

 

 

 

 

 

 

 

 

 

우으……

깼어요? 괜찮아요? 물줄까요?”

 

 

 

 언제 까무룩 기억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깨어보니 볕이 머리맡에 쏟아지는 중이다. 어제의 수컷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안절부절, 병아리처럼 뺙뺙대는 모습을 보니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종대는 울어서 부운 눈을 부비며 속으로 생각했다. 엄마 아빠 죄송해요. 자손은 두 형님들에게서 보세요. 어젯밤 막내 김종대는 남자랑 잤습니다. 게이가 돼버렸습니다. 아니 저렇게 잘생기고 귀여운 남자랑 안자면 그게 바보 아니에요? ?

 

 

혀엉, 괜찮죠?”

 

 

 세훈의 넓고 탄탄한 어깨가 종대를 감쌌다. 저를 껴안을 것같이 다가와 놓고 정작 종대의 가슴팍에 안착한 세훈이 종대의 안색을 살피며 작은 입술을 움직여 종알종알 말을 잇는다.

 

 

맞아요. 시도 때도 없이 카톡한 거랑, 형만 보면 막 먹인 거랑. 다 일부러 그랬어요. 형이 좋아서 그런 거 에요. 티 많이 났어요?”

 

 

 진작부터 얘 얼굴에 자신이 꼼짝 못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룻밤 잔 걸로 정말 홀라당 넘어갔는지, 부은 눈을 하고 옹알대며 핑크색 입술을 움직이는 세훈이 너무너무 귀여웠다. 시발 그래! 내가 지갑에 돈을 뿌리고 다녀도 이쁜 여자 못 만나는데 이렇게 얼굴 이쁜 남자라도 만나면 인생 다 이룬 거 아니냐! 종대는 눈웃음을 지으며 세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자꾸만 만지고 싶었다.

 

 

 

그래도오, 피피티에 글씨만 가득이랑, 너네 개 사진 일부러 넣은 건 심하지 않았어어?”

? 그거는 일부러 한 거 아닌데

 

 

 

 제가 제일 아끼는 사진이라 형도 좋아해 줄까봐 넣은 건데별로였어요? 세훈이 순진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았다. 미소 지은 채 그대로 굳었던 종대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세훈아, 너 혹시 다른 과목도 이런 과제 있니?”

, 저 전공제가 피피티 담당

가져와.”

 

 

 

 으아악! 어디 가서 내 남친이 븅신 취급 받는 거 못 봐!! 세훈이 깜짝 놀라 만류함에도 굴하지 않고 종대는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노트북을 끌어왔다. 전원을 켜고 기다리자 세훈이 맨몸 위에 이불을 끌어와 덮어주며 뒤에서 끌어안았다.

 

 

제 껀 제가 할 게요. 형 그러지 마세요. 저 때문에 일부러 하실 필요 없어요. 형 더 누워 있어요. ? 아프잖아요.”

너는 그러고 안고나 있어라. 훨씬 편하다.”

 

 

 

 그리고 너땜에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 좋아하니까 해주는 거지. 종대의 귓가가 붉게 물들었다. 이제야 비로소 완전히 세훈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너는 일부러 그랬던 게 아니야. 다 나를 좋아하는 맘이 흘러 넘쳤기 때문에.

 

 

 

 첫 남자친구에게 이불 째 끌어 안겨서, 전공 피피티 배경에서 강아지 비비 사진을 하나씩 지우는 종대의 얼굴이 반질반질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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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총불판 21제 키워드 '일부러 이러는거야' 참여작.

ㅊ1인트 보다가 생각나서 업로드..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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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판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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